3차원의 세계인 공간은 허허하고 그저 밋밋하다. 여기에 4차원의 세계인 시간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생동감으로 피어난다. 공간은 그저 정형화된 물질의 멈춤 상태일 뿐이다. 진행도 없고 변화도 없다. 시간이 없는 공간은 어쩌면 죽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시간이란 개념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생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상태, 멈춤의 상태에서는 시간이란 아무런 의미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생각하는 영혼이 함께 있을 때인 것처럼 말이다.
시간은 공간에서 일컫는 존재의 본질이거나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쉬지 않고 흘러가는 과정으로 여긴다. 우리는 단지 그 시간에 편승해서 삶을 영위해 나간다고 판단한다. 시간이란 과연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붙잡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무형의 간섭일까.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과학적으로도 입증했고 경험적으로도 인지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통해 ‘광속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움직일 때는 시간이 더디거나 일시 정지한다’는 것을 수학적 이론으로 입증한바 있다. 광속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라면 우리의 ‘생각’밖에 없다. 우리의 생각은 몇 백 광년 떨어져 있는 별을 순간적으로 다녀올 수 있을 만큼 빠르다. 광속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다.
불전에서 ‘영겁’에 대해 논한 것을 보면 시간은 무한하다는 개념이다. 이 우주공간이 무한한 것처럼 이다. 성경에서도 시간을 멈추거나 되돌린 사례가 수차례씩 언급되고 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다는 것은 죽음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인 것이다. 우리는 꿈에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생하게 만나곤 한다. 우리의 영혼이 시간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해석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시간은 일정 방향으로 속절없이 흘러가고 우리가 거기에 편승하고 있다는 개념은 어색하다. 공간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존재하는 시간을 우리가 소유하면서 어떤 땐 빠르게 소비하고 어떤 땐 더디게 소비하는 그런 것에 불과하다.
거듭 말하자면 공간이란 테두리는 사실 무에 지나지 않고 시간이란 개념이 있어 유가 실존한다는 뜻이다. 방금 전 화장실에 앉아있던 내가 지금 거실에 앉아있는 현상은 시간개념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 시간의 테두리가 없어 방금 전으로 자유로이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지금도 화장실에 안아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소유한 시간, 내가 운용하는 시간이라는 관념이 정립된다면 시간이 배제된 공간에 존재하는 이 세상의 물질은 한낱 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념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온갖 잡다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소한 물욕이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요즘의 세태에서 한 번쯤 되새겨봄직한 테두리 담론이다.